'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누가 구분 짓는 걸까?' 어린 시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괴사건의 피해자가 시간이 흘러 유괴범이었던 남자와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고통스럽고 슬프지만,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들에 더욱 가슴이 저려옵니다. 나기사 오가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상일 감독의 작품 '유랑의 달'을 소개합니다.
| 예고편
| 스토리
맑았던 하늘은 금새 사라지고 먹구름이 밀려와 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작은 공터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녀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내리는 비에 책이 젖을까 작은 몸으로 애써 가려봅니다. 같은 공간 한켠에 앉아 이를 지켜보던 청년은 조용히 다가가 자신의 우산으로 비를 가려줍니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소녀와 자신의 집으로 향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사라사 카나이', 청년은 '후미 사에키'. 후미의 집에 머물고 싶다는 사라사의 부탁을 후미는 이유를 묻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두사람은 다가올 태풍 앞에서 평온하고 행복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미는 사라사의 유괴범으로 체포되고, 사라사는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15년의 시간이 흐르고 동료와 우연히 찾은 카페에서 사라사는 후미와 재회합니다. 하지만, 왜곡된 진실은 또 다시 거센 비바람이 되어 두사람을 세차게 흔들기 시작합니다.
| 왜곡된 진실이 가하는 폭력에 대해
어쩌면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둘은 서로가 가진 상처와 아픔에 대해 알아봤는지 모릅니다. 견딜 수 없는 삶의 아픔과 고통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 것입니다. 낳아준 부모와 가족에게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고, 간신히 삶의 끈을 부여잡은 두사람에게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합니다. 후미는 사라사에게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을 안전한 공간을 내주었고, 소녀는 후미가 가진 아픔을 위로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세상은 이들에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사회규범'이라는 세상이 정해 놓은 잣대는 이들의 상황과 복잡한 감정들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저, 10살 소녀를 유괴한 소아성애자와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 그들을 가두고 끝나지 않는 폭력을 가합니다.
그날의 사건이 일어난지도 이제 15년이 흘렀습니다. 사라사와는 달리 둘의 결혼을 서두르려는 '료'에게서 조금함이 느껴집니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을지 모른다른 불안과 두려움은 그의 마음을 가득채우고 있습니다. 그가 사라사를 선택한 이유도 사회로부터 낙인찍힌 그녀가 쉽게 자신을 떠날 수 없을거란 믿음때문이었습니다. 사라사의 지울 수 없는 아픈 과거는 한 남자의 구속과 비뚤어진 소유의 도구로 사용되며 그녀를 괴롭힙니다.
불행한 사건의 피해자로 자신을 대하는 남자에게 사라사는 말합니다.
"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하지 않아."
세상의 시선이 만들어낸 왜곡된 진실은 이젠 버틸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두사람을 세상 끝으로 밀어내려합니다.
| 출연배우
히로세 스즈.
후미를 처음 만난 날 그랬듯, 카페 앞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후미에게 멋쩍고 복잡한 얼굴로 대답하는 사라사의 모습은 아직도 머릿 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분노'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사라사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릴적 트라우마와 후미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지닌 사라사역을 히로세 스즈는 훌륭하게 연기해 냅니다. 한 기사와 동영상에서 '분노'의 '코미야마 이즈미'역을 연기하며 이상일 감독에게 호되게 지적을 받았다는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지만, 이 작품에서 그녀가 얼마나 재능 있는 연기자로 성장했는지 뛰어난 연기로 증명해 냅니다.
마츠자카 토리.
영화 '신문기자'로 제43회 일본아카데미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마츠자카 토리의 연기 역시 이 작품에 깊이를 더합니다. 마츠자카 토리가 연기한 후미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사라사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물로 후미의 사라사를 향한 감정과 내면의 고독감을 탁월하게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고독하고 우울한 눈빛과 표정, 깡마른 몸은 그의 내면의 상태를 형상화한 듯 합니다.
시라토리 타마키.
또 한명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사라사의 어린시절을 연기한 14살의 아역배우 '시라토리 타마키'입니다.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한 내면의 감정을 능숙하게 표현해 냅니다. 후미를 처음 만난 날,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고 우산을 받치고 있는 후미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은 내면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앞으로 이 뛰어난 여배우가 어떻게 성장해 갈지 너무도 궁금해지는 이유입니다.
| 비극적 낭만주의와 아름다운 영상미
이상일 감독은 그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세상이 정한 관습과 규범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부조리들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그가 말하는 주제와 이야기는 무겁고, 어두우며, 날카롭고, 진지하지만 이를 표현해 내는 장면들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낭만적이기까지 합니다. 그의 전작 '분노'와 이 영화의 특징적인 공통점중의 하나입니다. 대표적인 장면으로 '분노'에서 섬을 향하는 보트를 푸른 바다와 함께 부감으로 잡아낸 장면은 너무도 아름답고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유랑의 달'에서도 이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집니다. 봉준호 감독의 소개로 홍경표 촬영감독이 함께한 이 작품의 영상미는 보는 이들의 시선과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것입니다.
색채와 조명, 폐쇄된 공간과 자연의 대비, 정적인 카메라 워크, 비와 물 그리고 계절의 변화 등을 아름답게 담아낸 장면들은 인물의 상황과 감정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내지만, 홍경표 촬영감독이 선물하는 아름다운 장면들,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런 만족감을 선사합니다. 모든 장면들이 그렇지만 특히, 어린 사라사와 후미가 보낸 두달간의 시간을 담아낸 장면들은 한컷 한컷 사진으로 남겨 놓고 싶은 장면들의 연속입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섬세한 영상은 인물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과 감정을 더욱 극대화 시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일 감독이 지닌 영화적 힘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정한 규범과 시선은 절대적이고 도덕적인가? 개인이 처한 복잡한 상황과 감정을 쉽게 재단하고 규정지을 힘을 누가 부여하는가?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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